이제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홍승재 사장이 뉴저지 팰리세이드 파크에 자리한 클린에어 사옥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미 동부 최대 규모 한인 서플라이 회사. 미 동부 최대 규모 한인 장비 회사. 세계 최대 규모 상코샤 공인 딜러. R.R. 스트릿 사 최초의 한인 공인 딜러. 풀톤 보일러 사 최초의 한인 공인 딜러. 클린에어 서플라이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참 다양하다. 그만큼 클린에어 서플라이는 한인 세탁업계에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 매김을 했다. 클린에어 서플라이가 내년이면 설립 40주년을 맞는다. 그래서 홍승재 사장을 만나 지난 이야기와 세탁업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어 보았다.

클린에어 서플라이는 어떻게 출발했는가?

내가 미국에 온 게 1984년이었다. 남들처럼 야채가게부터 시작했다가 당시 뉴욕에 있던 서플라이 회사인 C&A 서플라이에 취직하게 됐다. 당시 뉴저지엔 한인 서플라이 업체가 없었는데, C&A 서플라이의 정용화 사장이 나보고 뉴저지에 가서 해보라, 당장 창고부터 얻어라 해서 당시 무나키란 곳에 2천 스퀘어 피트 창고를 얻은 게 클린에어의 시작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C&A에 프랜차이즈 요금처럼 목돈을 내고, 서플라이를 공급받았다. 처음 약속은 2, 3 개월 후부터 내 창고로 직접 물건을 받게 해준다고 했는데, 근 2년을 뉴욕을 오가며 물건을 실어와야 했다. 이 때문에 알력이 생겼고 결국 정 사장이 서플라이 공급 중단 통보까지 이어졌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핏츠버그에 있던 미국 서플라이 업체로부터 더 싼 가격에 물건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서플라이 회사로서 “라인을 잡는다”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뼈저리게 깨달았고, 꾸준한 노력으로 라인을 하나씩 늘여갔다. 한인 업체로는 처음으로 R.R. 스트릿 공인 딜러가 됐을 때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았다.

클린에어는 서플라이 업체로서 보기 힘들게 장비업을 겸하고 있다. 그렇게 된 연유가 있는가?

친구 한 명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소위 “오퍼상”을 했다. 그 친구가 한국에서 드라이클리닝 머쉰을 가져오겠다고 해 나는 말렸다. 그런데 결국 가져왔다. 나는 서플라이니까 대신 파울러란 장비회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게 델타 머쉰이다.

그런데 한 6개월 있다가 기계 한 대가 파울러에서 리젝트를 먹었다고 창고에 보관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서플라이 손님 중 한 분이 저렴한 가격의 클리닝 머쉰을 찾았고, 그래서 창고에 보관 중이던 델타 머쉰을 원가에 팔았다. 그게 1991년쯤일 것이다.

나는 친구를 한 번 도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했던 애프터 서비스 문제가 생겼다. 당시 모든 사람이 서플라이가 장비를 하면 A/S 문제로 손님 다 떨어진다고 말렸다. 하지만 이미 기계를 팔은 후였기 때문에 발을 뺄 수 없었다. 결국 애프터 서비스 때문에 장비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었다.

클린에어는 특히 상코샤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잘 알다시피 1993년 시카고 클린쇼에서 상코샤가 첫 선을 보였다. 당시 나는 장비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참 독특한 기계네’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서플라이 손님 중 한 분이 상코샤 광고를 갖고 와 ‘이걸 구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게 크랜스톤에 자리한 래리탄 클리너였다.

당시 상코샤는 미국 데뷔 후 1년간 한 대도 못 팔고 있다가, 시카고에서 본사 협조로 한 한인 세탁소에 1호기를 판매했다. 그 다음에 내가 팔았으니, 정식 딜러 등록 그리고 딜러가 이룬 판매, 둘 다 내가 1호였다.

드라이클리닝 머쉰 A/S로 애를 먹던 중이었기에 고장이 없는 상코샤는 정말 신세계와 같았다. 그 후 기록된 상코샤의 승승장구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현재 세탁업계가 당면한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행어 판매량을 보면 팬데믹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 어쩌면 작년보다 금년이 조금 더 슬로우한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세탁소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지금도 문을 닫는 업소가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세탁 경기를 낙관하고 있다. 달도 차면 기운다지만, 다시 차오르는 게 순리다. 지금까지 가게가 있던 곳이 빈 자리가 되고, 그 자리는 다시 채워진다. 그렇게 순환하는 게 세상 이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년부터 세탁소 경기와 장비 판매, 둘 다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혹자는 한인 세탁업이 노령화됐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답하겠는가?

나 자신이 일흔 고개를 넘어섰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웃음) 나는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내가 어떤 일을 오래 했다는 걸 자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은 사고의 경직을 가져온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마인드가 있다면,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많이 판매하는 품목이지만, 어떤 업소는 몇십 년째 “We ♡ Our Customer” 한 문구만 사용하고 있다. 케이프 메시지조차 바꾸지 못한다면 어떻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까?

한인 세탁업은 노령화가 아니라 변화의 부재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팬데믹을 겪었지만, 이제 ‘하던 그대로 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

지난 몇십 년을 해 온 세탁소에서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가?

공부해야 한다. 세탁업은 다른 소매업보다 오우너의 학력이 높다.

펄크를 쓸 땐 빨래가 잘 됐다. 그래서 누구나 다 똑같이 빨았다. 하지만 하이드로카본을 사용하면서 남보다 더 깨끗하게 빨려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요즘 웨트클리닝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웨트클리닝 업소를 방문해 보면 일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출발점이 같았지만, 각자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그런 차이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클린에어 오픈 하우스는 지역 세탁인들 간에 가장 인기 높은 행사로 자리잡았다. 사진은 작년 행사 모습.

지난 40년을 소처럼 묵묵히 걸어왔다. 앞으로 어떤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가?

내가 시작했을 땐 어느 업소를 가도 다 “형님”이었고, 모두 동생 위하듯 잘 해주셨다. 그땐 안전핀 한 박스만 주문해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일 7시에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지만, “그때의 초심을 지금도 갖고 있을까?”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한 길을 걸었고, 나에게 “수고했다”라고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하지만 이 “수고”는 미래가 아니다.

클린에어를 그 다음 단계로 올려 놓을 “비젼”이 필요하다. 온라인 비즈니스, 호텔 등 타 분야 진출, 전문 기업화 등 지금까지 내가 하지 못한 시도와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에 와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클린에어를 다음 세대로 이끌어줄 “인물”이 필요하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면?

그때까지 클린에어에 앉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나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미국 온 이후 한 번도 잡지 않았던 바둑돌을 다시 잡고 싶다 (홍 사장은 고등학생 시절 아마 4단에 올랐지만 ‘그걸로 어떻게 먹고 살려느냐’는 가족과 친지의 질타로 대학 진학과 함께 바둑돌을 놓았다). 내가 살면서 가장 순수하게 사랑했던 게 바둑이다. 아무런 욕심 없이 다시 공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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