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천사가 여행을 하다가 어느 집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기를 청하려고 대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주인 남자는 자기 부인에게 큰소리로 야단을 치고 있었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그는 불청객들에게 빈방이 없다고 야박하게 거절을 하다가 돈을 주겠다고 하자, 마지 못해 차갑고 비좁은 지하실의 구석 방을 빌려주었다. 메마른 인정을 안타까워하며 딱딱한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하던 나이 든 천사가 문득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했다. 구멍을 자세히 들여다본 그는 주인 남자가 눈치채지 않게 조용히 그것을 꼼꼼하게 메꾸었다. 젊은 천사가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네…”
그다음 날 두 천사는 길을 떠나 매우 가난한 사람의 집에 당도했다. 그 집 주인인 농부와 만삭의 아내는 그들을 아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만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서 대접했다. 그리고 누추해서 미안하다며 자신들의 안방을 쓰도록 내주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그런데 집주인 내외가 목을 놓아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젊은 천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가난한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아침부터 대들보가 내려앉기 시작했어요. 이제 막 추운 겨울이 시작되어 오도 가도 못 하고, 배가 남산만한 아내는 오늘 내일 하는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근심에 가득 찬 농부네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서자 젊은 천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었느냐고 몹시 화를 내며 이렇게 따졌다. “인색한 집 주인에게는 지하실 벽을 막아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해주고 마음씨 좋은 농부 부부에게는 어떻게 살라고 대들보가 내려앉게 그냥 두었습니까?”
그러자 나이 든 천사가 대답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네. 우리가 묵었던 지하실의 벽 뒤쪽에서 금맥이 시작되는 것을 발견했지. 그 집 주인은 인심이 너무 사나워 절대로 자신의 재물을 나누지 않을 걸세. 그래서 나는 벽에 있는 구멍을 꽁꽁 틀어막아 금맥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한 걸세. 그리고 어젯밤 농부네 안방으로 들어가다 보니까 대들보 밑에 커다란 금덩이가 숨겨져 있더군. 아마도 농부네 가족이 이사 오기 훨씬 오래 전에 누군가가 감추어 놓은 것 같은데 농부의 가족은 전혀 모르고 있지. 지금쯤 대들보가 거의 다 무너졌을 테니까 금덩이가 보이기 시작했을 걸세.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본 것이 모두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눈’에 관한 책을 출간한 어느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눈은 우리의 모든 감각 중 가장 중요한 기관이며 눈으로 본 것을 가장 쉽게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눈이 바라보았던 일부분만을 가지고 마치 전체를 본 것처럼 판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이성을 가진 생각과 감성을 가진 마음이 합쳐지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도의 바케이 선교사가 친구 선교사와 함께 험한 길을 따라 구릉지대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 걸어간 후에 그들은 계곡의 급류 위로 연결된 좁다란 밧줄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그 다리를 많이 건너본 친구 선교사는 밧줄 다리를 건너 먼저 건너편에 도착했지만 바케이 선교사는 쩔쩔매며 겨우 다리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다리 밑에서 소용돌이치는 급류를 내려다보자 현기증이 느껴져 더는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친구 선교사가 바케이 선교사를 향해 소리쳤다. “아래를 내려다 보지마! 여기 보이는 큰 나무를 똑 바로 쳐다보라고!” 그 충고는 효력이 있었다. 바케이 선교사가 세차게 흐르는 물결에서 다리 건너 편의 큰 나무로 시선을 돌렸을 때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어졌다. 그리고 담대히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젊은 병사와 결혼해서 캘리포니아의 어느 사막에서 살게 된 한 여인이 있었다. 남편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사막의 황량함과 혼자 지내야 하는 지루함을 참다못한 그녀는 마침내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웠다. “어머니, 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메마른 사막이 그저 싫을 뿐이에요. 이곳은 살기에 너무 끔찍한 지역이랍니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가 답장을 보내왔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아주 짧은 글이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철창을 내다보고 있었단다. 한 사람은 진흙 창을 바라보며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또 한 사람은 밤이면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를 써서 유명한 시인이 되었단다.” 어머니가 보낸 글의 의미를 깨달은 여인은 별을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관해 연구하고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 전통을 연구했다. 그 결과 남편의 복무기간이 끝날 즈음에 그녀는 사막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책을 발간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역경을 만나 홀로 눈물을 삼켜야 하는 캄캄한 밤 같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밤이 돼야 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절망의 끝자락에서야 희망의 한 줄기 빛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고 일어설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만이 인생 역전 드라마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발밑으로 보이는 소용돌이 치는 물결과 황량한 사막을 바라보는 대신에, 다리 건너 큰 나무와 하늘의 별빛을 바라본 선교사와 사막의 여인처럼.
2년도 넘는 코로나에 이어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온 세상이 혼란스럽다. 개스비와 물가는 폭등하고 혹시라도 핵전쟁의 우려도 간과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잠시 숨을 돌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시간을 반추해 보자. 어느 한해, 다만 몇 달, 며칠 동안만이라도 그저 평안하고 즐겁기만 했을 때가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시간이 흘러 과거라는 이름을 붙여 뒤돌아볼 때 그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웠어도, 지금은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자리매김을 한 일이 그래도 꽤 여러 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어려움 또한 지나갈 것임이 틀림없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 말이야.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눈 대신 갖게 된 거… 그렇지, 바로 마음의 눈이야. 이걸 지혜라고 해도 좋고, 분별력이라고 해도 좋고, 철이 있다, 없다 할 때 그 철이라고 해도 좋아. 한마디로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졌단 말이야.” – 양순자의 《인생 9단》 중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감탄하면서 어떤 사람이 물었다. “보잘것없는 돌로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그 형상은 처음부터 화강암 속에 있었죠.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들만 깎아냈을 뿐입니다.” – 이민규의 《1%만 바꿔도 인생이 달라진다》 중에서
검은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어둡게 보인다. 그렇지만 핑크빛의 즐겁고 환한 느낌을 주는 빛깔로 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은 아름다워 보인다. 눈사람 떠난 자리에서 봄소식을 실어 오는 냉이랑 달래를 보고, 밧줄 다리 아래로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결 대신 건너편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황량한 사막을 못 견뎌 하는 대신에 희망의 빛으로 다정하게 손짓하는 별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1장 34절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성경 말씀처럼 이와 같은 때에 실제로 바라볼 수 없어도 앞으로 갈망하는 것들을 우리 마음을 통해 바라보며 살아가는 복된 4월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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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남
필자는 다이아몬드 컴퓨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글에 대한 문의는 (224) 805-0898로 하시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