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질문을 받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발을 떼고 제대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나 넘어질 것으로 생각하느냐였다. 글쎄, 오백 번쯤 될까? 아니면 천 번? 그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답은 삼천 번이란다. 아기는 자그마치 삼천 번을 넘어진 후에 제대로 걷기 시작한다. 아기의 신체 구조는 기형이다. 머리가 몸통보다 훨씬 크고 무거워서 균형을 잡을 수 없는 가분수다. 그런 이유로 온몸으로 넘어져 수없이 깨지고 다친다. 머리 한쪽에 난 혹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쪽에 혹이 붙는다. 다치는 일이 익숙해지면 피가 나서 아프다고 울다가도 어느 순간 무릎에 반창고를 붙이는 일은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이렇게 걷고자 하는 아기의 처절한 노력은 계속된다. 그리고 어느 날 혼자 서고, 뒤뚱뒤뚱 걷다가, 아장아장 걷다가, 후다닥 뛰기 시작한다. 우리는 삼천 번이나 넘어져 깨지고 아파도, 다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던 용감한 아기들이었다.
그렇게 용감했던 아기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겁쟁이로 변한다. 걱정과 염려가 일상이 되고 때로는 낙망해서 좌절하기도 한다. 오늘은 근심하고 내일은 염려하면서 겁먹은 어른 아이로 살아간다. 갑자기 흥미로운 질문이 생겼다. 우리는 한평생 살면서 몇 번이나 염려할까? 하루에 한 번이라고 가정해 보면 1년에 약 365번, 60년으로 계산하면 21900번이다. 그러고 보면 거의 매일 걱정과 염려 속에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걱정이 많은 사람일수록 한결같이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주변 사람들의 한평생을 눈여겨 보면서 더하기와 빼기를 해보면 놀랍게도 매우 공평한 것을 알 수 있다. 금실 좋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부부가 있다. 그들은 20대 초반에 미국에 와서 대기업에서 고위급 간부로 일하면서 평생을 넉넉하게 살았고, 연금도 많았으며 얼마 전 배당 받은 주식이 두 배가 되어 몇백만 불의 재산가가 되었다. 그런데 1년 전 아내가 60 중반에 뇌졸증으로 넘어져 세상을 떠났다. 어느 날 아침 화장을 하던 아내가 쓰러져 그 길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그 이후 남편은 1년 내내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의 묘에 가서 모닝 커피를 마시고 혼자 얘기를 하고 울다가 돌아오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가진 재산 모두 가져가도 좋으니 아내만 돌아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말했다. 요즘은 100세 시대인데 만약 30년도 더 넘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외로워서 어떻게 사냐며 또다시 울먹였다.
장애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점심 봉사를 간 적이 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10대 초등학생부터 40대 중년까지 있었다. 그들은 예배 중에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웃고 울기를 반복하고 괴성을 질렀다. 한 부모는 아이가 계속 돌아다닌 뒤를 쫓아다니며 보살폈다. 잠시도 쉴 틈이 없어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함께 식사하던 장애아 엄마에게 많이 힘드시겠다고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러자 웃으며 아이가 잘 지내고 있고 항상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녀의 활짝 웃는 얼굴엔 어떤 시름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 말대로 정말 행복해 보였다. 두 가정의 예를 보아도 삶은 공평했다. 그런데 삶을 통해 느껴지는 각자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다. 기준이 무엇일까? 그것은 연약한 자아, 즉, 나를 믿느냐, 아니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느냐다.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분의 도우심을 의지하게 된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믿고 의지하면 부모님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신 것과도 같다. 하지만 부모님을 거역하고 집을 나갔을 때 어떤 고생이 뒤따를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믿음은 이렇듯 최악의 상황을 최선으로 변화시키는 위력이 있다. 이미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믿고 싶어도 잘 안 믿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잘 안 믿어지는 하나님, 어떻게 믿을 것인가?
수년 전에 한국의 선한 목자 교회의 은퇴 목사이신 유기성 목사님이 시카고에 오셔서 예수님과 24시간 동행일기 세미나를 주관하신 적이 있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시간에 삶을 돌아보는 예수 동행일기를 쓰면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확인하는 시간임을 전하셨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저만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가 그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고 안심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 이후에 예수 동행일기를 계속 쓰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하게 교제하는 시간이 되었다. 동시에 찬양이 즐거워지고, 성경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졸리기만 했던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마음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 정말 삶은 다른 세상이 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쇠락해지는 육체의 반란으로 인한 고통과 불편함, 서로 주고받는 상처들, 혼자만 외로운 것 같은 고립감 등등,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요소는 여전히 똑같은데 받아들이는 마음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지루한 일상이 아니라 가장 평안한 하루로 느껴졌고, 아픈 곳이 생겨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고, 함께하면 유쾌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와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것은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그분을 바라보는 동안 평안과 감사와 기쁨을 누리게 하셨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삶이 주는 평안과 기쁨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마치 첫사랑의 설렘이 지속하는 것과 비슷하다. 내 맘이 행복하니까 모든 관계가 즐거워졌다. 그리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놀라게 되었다. 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을 믿으니까 안심이 된다.
그러면 그 믿음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란 질문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한 끼 잘 먹었어도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파서 먹어야 하듯이, 영적인 것도 지속해서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고 답할 수 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한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좋은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일주일에 밥 한번 먹고 7일을 굶고서 버티는 것과 똑같다. 아무도 그렇게는 살아 낼 수가 없다. 매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를 돌아보고, 말씀을 더 읽고, 성경공부에 참석도 하게 되면서 믿음의 밀도가 점차 촘촘해진다.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성경 말씀을 통해 믿음이 생기는데 거기까지 미치는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자리에 함께하면서 마음을 나누고 힘을 실어 줄 수 있다면 훨씬 쉽고 힘이 난다. 예수 동행일기가 그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것의 장점은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드리는 시간이 된다.
예수 동행일기를 쓰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지구촌 어느 곳에서 자신과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그들도 예수님과의 동행을 통해 다시 일어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위로의 한마디 말로 들릴 것이며 좌절을 털어낼 힘을 갖게 한다. 어쩌면 처음 쓰는 사람들에게 예수 동행일기는 고단한 삶의 하소연일지 모른다. 하지만 마치 아이가 처음엔 엄마에게 칭얼거리며 필요한 것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난 후엔 스스로 찾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물론 동생에게까지 나눠주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과 흡사한 것 같다. 나날이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나누며 도전이 되고 넘어질 때마다 서로 힘을 실어주는 날개가 되어주는 삶, 이것이 예수님과의 행복한 동행, 예수 동행일기 나눔방 축복이다. 공원 입구에 가면 지도가 있다. 아무리 공원이 넓고 수목이 많아 복잡하더라도 지도를 보고 들어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느 코스에 마실 물이 있는지, 쉼터가 있는지를 알고 공원을 산책하다가 목이 마르고 힘이 들면 그곳을 찾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일기는 그런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제 다시 3천 번 넘어져도 다시 당당하게 일어나서 걸었던 용감함을 되찾자.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도 않은데 더는 근심과 염려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100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장수한 사람들이 매일 저녁에 일기를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면서 감사를 반복하는 일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두려움과 염려를 몰아낼 뿐 아니라 엔돌핀 분비를 촉진하고 면역력을 증대시킴으로 건강하게 해준다. 요한복음 15장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는 성경 말씀 마음에 깊이 새기고 24시간 예수님과 동행일기를 기록하며 이곳에서의 평안하고 기쁜 삶이 저 높은 곳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아름답게 이어지는 통로가 되는 복된 5월이 되기 바란다.
참고로 Google에서 ‘예수 동행일기’를 검색하면 된다.
월간 세탁인 독자님들을 참 ~~ 많이 사랑합니다. 오늘도 하하하! 많이 웃으세요.
캐롤 남
필자는 다이아몬드 컴퓨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글에 대한 문의는 (224) 805-0898로 하시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