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데이트

오랜만에 김선배 님을 만났다. 그녀는 어느덧 70대 초반, 인생의 후반에 서 있었다. 젊은 시절에 남편 유학으로 미국에 왔다. 그들 부부는 가난한 유학생 부부였고 세탁소 프레스와 카운터를 보면서 고된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아왔다. 해야 할 일이 늘 많았고, 책임도 가벼운 적이 없었다. 한발이라도 늦으면 뒤처질 것 같아 늘 서둘렀고, 잠시 멈추는 것조차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더 많이 이루고, 더 안정적인 삶을 만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녀가 믿어온 ‘잘 사는 삶’이었다. 유학 생활이 너무도 고되어 남편도 중도에 공부를 포기하고 그녀와 함께 세탁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비즈니스는 승승장구했다. 공장과 드롭-오프를 여러 개 운영하며 이민자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차고가 3개 있는 초호화 주택, 벤츠 자동차, 다이아몬드, 밍크 코트, 샤넬 핸드백으로 옷장을 채웠으며 자녀들도 명문대를 졸업하고 의사와 변호사가 되었다. 세상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런데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허무함이 가슴 한쪽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오십 중반을 넘기면서 그녀의 안에서 조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변화는 특별한 사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마치 스며들듯 찾아왔다. 어느 날 그녀는 옷장을 정리하다가 한참을 서 있었다. 잘 정리된 옷들 사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까.” 옷은 충분했고, 오히려 넘쳤다. 그러나 자주 입는 것은 몇 벌 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혹은 그렇게 사는 것이 바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쌓아왔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 그녀는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옷뿐만 아니라, 삶의 기준들도 함께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의식했다.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선택할 때도 ‘이렇게 하면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그 부담을 내려놓는 순간,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체면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자신을 묶고 있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 하나 그녀가 내려놓기 시작한 것은 과거였다. 그녀는 종종 “내가 예전에…”라는 말로 자신을 설명하곤 했다. 그때의 성취와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지탱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조용한 날, 혼자 앉아 있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해주고 있는가.” 대답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알고 있었다. 과거는 소중한 기억일 수는 있어도, 현재를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오히려 과거에 머물수록 지금의 삶이 흐려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이후로 과거를 설명하는 시간을 줄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오래 그녀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비교였다. 누가 더 잘 사는지, 누가 더 앞서 있는지, 그 기준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곤 했다. 비교는 그녀를 더 노력하게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 노인을 보게 되었다. 그 노인은 혼자 앉아 햇빛을 받으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특별한 것도, 대단한 것도 없었지만 그 표정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평안함이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 평안은 비교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 노인은 누구와도 자신을 견주지 않았고, 그저 그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노인을 만난 날 이후 그녀는 조금씩 비교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용하지만 깊은 평안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십오 세를 지나며 그녀는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육십오 세를 넘기면서, 그녀는 또 다른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삶의 ‘리듬’을 다루는 일이었다. 예전의 그녀는 여전히 서두르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책임감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느 날 무리하게 일을 마친 후, 그녀는 며칠 동안 깊은 피로 속에 머물러야 했다.
그 경험은 그녀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계속 밀어붙이는 것이 강함이 아니라, 자신의 속도를 아는 것이 지혜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이후로 자신의 하루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서두르지 않고 잠시 앉아 차를 마신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건강한 아침을 맞이하여 창밖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하루 전체를 안정시키는 중심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멈추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더 버티려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자신의 상태를 먼저 살핀다. 몸이 지쳐 있으면 쉬고, 마음이 무거우면 잠시 멈춘다. 그녀는 그것이 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더 오래, 더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작은 습관이 생겼다. 하루 중 몇 번씩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가.” 그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녀의 삶을 지켜주는 중심이 되었다. 그녀는 점점 외부의 조건보다 자신의 내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칠십오 세에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삶은 더욱 단순해졌다. 예전에는 중요하게 느껴졌던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 대신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발로 걸어나가 햇빛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녀는 깊이 깨닫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관계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오랜 지인과 짧은 통화를 나누었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의 마음은 따뜻하게 채워졌다. 그 짧은 연결이 하루를 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마음의 상태’가 삶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상황이 어떻든 크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 비교하지 않고, 지나간 일에 머물지 않으며, 지금을 받아들이는 힘.
그녀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가끔은 비교의 생각이 올라오고,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그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며, 그녀는 한 가지를 분명하게 붙잡게 되었다.


어느 조용한 날, 그녀는 성경을 펼쳤다. 그리고 한 구절을 읽게 되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그 말씀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머물렀다. 그녀는 오랫동안 많은 것을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삶을 지탱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단했다. 이제는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며 살겠다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서두르며 불안하게 살아가기보다, 말씀 안에서 자신의 속도를 지키며 걸어가겠다고. 지나간 것을 붙잡기보다, 오늘 주어진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내겠다고.
그녀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중심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인생의 후반은 더 많은 것을 쥐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하나를 분명히 붙잡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하나는 분명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르며, 그분을 의지하는 삶. 그 결단 위에 서서, 그녀의 남은 시간은 이전보다 더 조용하고, 더 단단하며, 더 평안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김선배 님과의 특별한 데이트는 내 삶의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인생 후반은 약해져서 서글픈 시간이 아니라 지난날을 토대로 아름답게 영글어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는 축복이기도 하다. 어느새 계절의 여왕 5월이다.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너무도 정겹다. 이처럼 아름다운 계절처럼 우리들의 삶도 예쁘고 곱게 물들어가는 5월이 되면 좋겠다.

월간 세탁인 독자님들을 참 많이 사랑합니다. 오늘도 하하하! 많이 웃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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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남

필자는 다이아몬드 컴퓨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글에 대한 문의는 (224) 805-0898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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