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가 빨래하는 곳입니까?

팬데믹 이후 세상에선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언어 습관 중 하나가 누구를 지칭할 때 직책을 이용하는 것이다. 언어 습관을 넘어 이걸로 존경의 뜻까지 표현한다. 부장님, 사장님, 선생님, 심지어 부모님까지. 직위 높낮이에 따른 존경 표시를 하다 보니, ‘님’이 붙으면 어색한 단어가 함께 존재한다. 학생, 직원, 자식 등 서열 상 아래인 ‘직책’에는 왠지 ‘님’이 붙으면 어색하다.

필자가 사는 곳엔 러시아 인구가 많다. 우연히 알게 된 한 러시아 사업가가 한 얘기인데, 러시아에선 어떤 사람을 부를 때 직책으로 부르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며, 한국에 갈 때마다 거래처 직원들이 동석한 상관에게 ‘부장님’ 또는 ‘사장님’ 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한다.

왜 직책으로 부르면 불쾌하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부르면 자신의 인간성을 무시하는 것 같아 심지어 모욕감까지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너는 그 일이나 하는 놈’ 같은 느낌이랄까?

그는 또 한국 사람이 호칭만으로 서열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진정한 인간적인 교류가 이뤄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향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지적이라 아무 말도 못 했다.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가 처음 누구를 만났을 때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는 것은 “너 나보다 어리니까 내 아래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누가 “아, 이분은 한국에서 대기업 이사까지 지내시다 오셨습니다”라고 소개했다면, 이 말속엔 “이 사람이 지금 미국에서 세탁소나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신분 선언’이 숨어있다.

우리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아, 이 상놈의 나라는 학생이 선생 이름을 그냥 불러” 또는 “그 집 갔더니 아들이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데?”라는 말을 한, 두 번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언어 습관은 예의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에서 나왔지만, 한 편으론 직책에 대한 존비 관념을 우리 머릿속 깊이 심어 놓았다. 남을 얕보는 거로 모자라 자신까지 비하한다. “남의 더러운 옷을 빤다”느니 “내가 지금은 옷이나 빨고 있다”라느니 세탁소를 하는 자신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발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세탁소가 하나의 비즈니스가 아니라 말 그대로 “빨래나 하는 곳”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늘 하던 대로, 그냥 그렇게, 아침에 나왔다가 저녁에 집에 간다. 세탁소란 사업체의 영업 상태 분석과 전략 수립은 고사하고, 십몇 년 된 장비를 아직 잘 돌아간다고 쓰고 있다. 사업가는 작업 효율에 노심초사 하지만, 빨래 빠는 사람은 그럴 일이 없다. 골프 스윙 자세를 연구하고 레슨받아 향상시키지만, 정작 생업인 세탁소는 늘 그 모양 그대로다.

왜 그럴까?

러시아 비즈니스맨이 지적한대로 ‘직책’ 또는 ‘역할’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잘 나가는 사업가일 때 양로원에 봉사 나가면 더러운 옷을 빨 때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자녀 인성 교육 한다고 애들까지 데리고 갔다. 왜? 나는 원래 사업가지 빨래 빠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심 ‘체면’ 구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빨래가 생업이니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부모 앞에선 자녀 역할, 배우자 앞에선 부부 역할, 자녀 앞에선 부모 역할, 친구와 만나면 친구 역할, 시민 역할 등 말이다.

세탁소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탁소에서 빨래하는 사람? 아니면 세탁소란 사업체를 운영하는 비즈니스맨?

당신이 생각하는 세탁소가 빨래하는 곳이면 당신의 역할은 전자일 것이고,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면 당신의 역할은 후자가 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모두 팬데믹을 이겨낸 승자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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