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작을망정 훌륭한 단서다. 왜냐하면, 뉴욕주 로체스터 출생이고 이스트만 커뮤니티 뮤직 스쿨 학생이었고, 할아버지가 Germanow-Simon Corp. 창설자인 사이먼 씨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보기 드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음악가로서는 작곡과 재즈 피아노 연주; 그리고 비즈니스로는 드라이클리닝.
음악 쪽에서, 사이먼 씨는 음반 9개와 여러 공연을 했다. 케네디 센터에서 연주했고,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갈라에도 초대받았으며, 전국의 여러 공연장, 재즈 클럽 그리고 커뮤니티 센터에서 연주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사이먼의 음악이 “조화롭게 세련됐고, 사로잡게 아름답다”라고 칭찬했다.
비즈니스 쪽에서, 파크웨이는 일반적인 동네 세탁소가 아니다. 그가 2001년 인수한 이래, 사이먼 씨는 파크웨이를 최고급 고객층에 중점을 두면서 연간 4백만 달러 비즈니스로 키웠다. 셔츠는 $4.95; 스웨터는 $25; 블라우스가 $25.95; 투-피스 양복이 $45에 시작한다 (픽업 & 딜리버리가 포함됐다). 파크웨이는 또한 역사적 그리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아이템도 다룬다. 이중에는 백악관과 대사관 드레이프, 양키 야구 전설 루 게리그 선수의 야구 유니폼, 포드 극장의 링컨 박스를 장식하는 국기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먼저 백그라운드.
사이먼 씨 가족은 로체스터에 뿌리가 깊다. 1916년 사이먼 씨의 조부 줄리어스 사이먼 씨와 비즈니스 파트너 해리 저마노우씨가 로체스터에서 작은 머쉰 샵을 열었다. 세계 1차 대전 중, 전방의 미군들이 손목시계 유리를 잘 깨트린다는 걸 안 둘은 플라스틱 대체품을 개발해 주요 공급자가 됐다. 저마노우-사이먼 사는 결국 세계 최대의 플라스틱 시계 크리스털 그리고 초정밀 플라스틱 렌즈 제조사가 됐다.
레너드와 일레인 사이먼 부부의 네 자녀 중 장남인 존 사이먼 씨는 브라이튼과 핏스포드에서 자랐고, 핏스포드 서더랜드 하이스쿨에 다녔다. 그는 척 맨지오니 재즈 밴드에서 연주했다. 음악가의 길을 걷고 싶은 그는 미시건 주립대학 음대에 등록했다.
그는 2학년 때 USC로 전학해 영화 음악을 공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해 여름 부모님이 그와 세 여동생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이때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만일 음악가의 길을 걷는다면, 과연 내 가족을 이렇게 좋은 여행에 데려갈 수 있을까? 내가 그럴 수입이 있을까? 그럴 시간이 있을까?”라고 그는 자문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이먼 씨는 “내가 항상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게 내 인생일 필요는 없다”라는 답을 얻었다.
가족 비즈니스에 들어간 생각에 사이먼 씨는 USC 전학 계획을 취소하고, 미시건에 남아, 전공을 산업 엔지니어링으로 바꿨다. 졸업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2년간 보스톤에서 일했다. 그후 그가 가족 비즈니스에 들어가 플라스틱 계열사의 공장 매니저로 일했지만, 3년 후 다른 길을 찾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미 결혼했던 사이먼 씨는 워싱턴 DC로 이주했고, 아내는 보이스 오브 어메리카에서 근무했다. 사이몬씨는 인터넷 스타트업 등 몇 개 회사에서 경영자로 근무하다가, 자영업을 하고자 인수할 비즈니스를 찾았다. 그리고 한 비즈니스 브로커가 파크웨이 클리너를 가져왔다.
“‘내가 크면 드라이클리너가 되겠다’라고 말하는 2학년짜리는 없다”라고 사이먼 씨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동창생 잡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하지만 그는 파크웨이에서 흥미진진한 기회를 보았다. 이는 1926년부터 영업해온 가족 비즈니스였고, 평판이 훌륭했다. 가족 비즈니스에서 제조업을 관리했으므로 그는 대형 작업이나 많은 종업원과 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첨단 컴퓨터를 통해 퀄리티와 효율을 향상할 여지도 어필했다. 그래서 사업을 인수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가 비즈니스를 키워야 할 시기에 작곡가와 연주자로서 정점을 찍었다.
“어떨 때는 3,000명 청중 앞에서 연주했고, 공연 후 CD를 천장씩 팔기도 했다”라는 그는 “하루 저녁에 $4,000을 벌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가장 바쁠 때 그는 전국적으로 24회가 넘게 공연하러 다녔다.
하지만 비즈니스와 가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이먼 씨의 연주 활동은 코비드 전에 연 6회 정도로 줄었고, 그 후 한, 두 번이 됐다.
이에 비해 파크웨이는 폭풍 성장을 했다. 사이먼 씨는 풀타임 직원을 25명으로 늘렸고, 컴퓨터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고, 픽업 앤 딜리버리를 위해 트럭을 5대 샀다. 그리고 2020년 플랜트를 노쓰 베쎄스다에 있는 10,000 스퀘어 피트 건물로 이전했다.
현재 파크웨이는 전형적인 동네 세탁소와 비슷한 게 하나도 없다. 프론트 룸은 천장이 높고 시원하게 뚤렸으며, 손님을 받는 컴퓨터 포지션이 3개나 있다. 그 옆으로 재봉틀이 3대 있고 재봉사가 필요한 수리와 얼터레이션을 한다. 앉을 수 있는 대기 공간에는 파크웨이의 부유한 고객층 입맛에 맞는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매거진과 명품 의류 캐털록이 비치돼 있다.
플랜트 뒤로 가면, 대형 클리닝 머쉰들이 있고, 모피, 울 정장과 스웨터가 천정까지 쌓여 있는 온도 조절된 스토리지 창고가 있다; 그리고 몇 명은 파크웨이에서 25년 넘게 근무한 프레서와 스팟터들이 일하고 있다. 오리엔털 카펫, 두터운 드레이퍼리, 섬세한 전등 갓, 그리고 고급 다이닝 룸 의자 등 스페셜티 아이템들도 볼 수 있다. 다른 구석에는 표범, 물소, 사슴, 얼룩말 등 다양한 박제 동물이 있다. 사이몬씨는 이게 “아프리카 큰 동물 사냥꾼” 소유라며, 집에 불이 나 클린하고 연기 냄새를 제거해야 한다고 섧명한다. 파크웨이에는 연기 냄새를 제거할 수 있는 “오존 룸”이 있다.
나중에 우리는 작업 공간을 바라보는 사이먼 씨 사무실에 앉았다. 사방이 명품이지만 그는 간단하게 청바지와 스웨터만 입고 있었다. 그는 66세 나이에도 날씬했고, 조금 흰머리가 나기는 했지만, 숱도 풍부했다. 다음에 우리의 대화를 정리해 보았다.
로체스터 비콘: 직접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드레이프를 클린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사이먼: 한 3년 전에 트럼프 행정부일 때 내가 직접 그 일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 있는 군기지에서 우리 차량과 클리닝 장비를 검사하는 데만 4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직 백악관이 가지도 않았는데 경호원이 따라다녔습니다.
로체스터 비콘: 아직도 피아노 연주를 합니까?
사이먼: 네. 아직도 집에 스타인웨이가 있습니다. 동쪽 해안에 있는 두 번째 집에는 작은 전기 그랜드가 있고 이걸 연주하는 것도 즐깁니다. 하지만 매일 집에 가서 연주하지 않습니다. 지쳤으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연주할 기회가 있으면, 특히 주말에 연주합니다.
로체스터 비콘: 음악가, 소설가, 시인 중에는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일반적인 직장에 다니며 안정된 생활을 추구한 경우가 많죠. 예를 들어 (소설가) 허만 멜빌은 뉴욕 항구의 세관 인스펙터였고, (소련 작곡가) 보로딘은 화학자였습니다.
사이먼: 그리고 (미국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는 보험회사를 갖고 있었죠.
로체스터 비콘: 그렇습니다.
사이먼: 인생은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나는 내 가족을 사랑합니다. 나는 내가 이런 비즈니스를 구축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덕분에 세 아이를 대학에 보냈고, 킬리만자로 등반 등 멋진 여행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올여름에 시실리에 가서 하이킹과 바이킹을 할 겁니다.
로체스터 비콘: 연주가의 길을 포기한 걸 후회하지 않나요?
사이먼: 가끔 음악을 했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꿈을 꿔보는 거죠. 내가 USC에 갔다면,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다녔을 겁니다. 그랬다면 내가 그의 존 윌리엄스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뇨. 저는 존 윌리엄스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양한 음악적 아이디어와 훈련을 가졌다면, 글쎄요 누가 알겠습니까?
로체스터 비콘: 파크웨이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을 텐데, 자녀 중 비즈니스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나요?
사이먼: 서로 얘기를 해보았는데 현재로선 없습니다. 29세에서 34세까지 세 명이 있는데 다들 브룩클린에 살면서 창작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음악 에이전트입니다. 딸은 PR 회사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막내아들은 광고 회사 창작 감독입니다. 현재 모두 행복해합니다.
로체스터 비콘: 만일 나중에 비즈니스를 판다면, 다시 연주할 건가요?
사이먼: 그럴 수 있지요. 내가 연주하려던 마지막 콘서트가 로체스터 JCC였는데 코비드로 취소됐습니다. 내가 은퇴한다면? 아마 저는 곡과 연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겁니다. 전 골프를 안 칩니다. 저는 연주가입니다.